거울로 빚어진 얼굴을 산산히 깨뜨려 봐도 내가 아니고
내가 썼다는 시를 펼쳐 글자들을 하나 하나 뜯어 봐도 내가 아니고
옷장 속에 걸린 옷 그 암홀에 팔다리를 집어넣어 봐도 내 허우대가 아니고
내 핏속에서 자란 아이들의 피는 유전자 변이돼 내 피가 아니고
내 입안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는 이생 너머 전생의 메아리이거나 내생의 넘실거림이고
사진 속에 사로잡혀 있는 건 나라는 착시 또는 가공
열 살 적 위인과 스무 살 적 여인과 서른 살 적 시인은 온데간데 없고
머리 위 하늘도 발치의 꽃도 그 사이 다리를 놓은 나무도
모두 다 근사한 화면인데 나만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이고
맘대로 살 수도 없지만 맘대로 죽을 수는 더 없고
살아도 치욕이지만 죽는 건 더욱 굴욕인,
다 내가 아니라지만 또한 그게 다 나라고도 하는
이 무서운 퍼즐
'SCRAP' 카테고리의 다른 글
이운진 - 해빙기 中 (0) | 2017.01.12 |
---|---|
나태주 - 추억의 묶음 (1) | 2016.11.30 |
서안나 - 애월 혹은 (0) | 2016.11.22 |
김언희 - 바셀린 심포니 (0) | 2016.11.22 |
강연호 - 저 별빛 (0) | 2016.11.22 |